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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새크라멘토 한인장로교회 박상근 목사


바울이 지적한 성인아이의 두 번째 문제는 깨닫는 것의 문제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에 대한 깨달음을 의미할까요? 무엇보다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힘을 말합니다. 아이들은 자기 내면의 욕망이 강하여서 선이 아닌 악을 선택합니다. 나중에 엄청난 야단을 맞고 고통을 겪을 지라도 지금 눈에 보이는 쾌락을 거부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자기 합리화에 빠집니다. 어른이 되면 악을 거부하고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도덕적 힘이 생겨야 하는데, 성인 아이는 여전히 자기 합리화에 빠져서 죄책감이 없습니다. “내가 이러는 것은 우리 부모 탓이야, 우리 남편 탓이고, 아내 탓이야!”라고 합니다. 깨달음이 어린 아이와 같기 때문에 죄에 대한 자기 책임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잘못 깨닫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내가 이런 죄를 지어도 사랑해주실 거야. 나중에 회개하면 되지.”라고 생각합니다. 성인아이는 자신이 죄를 짓는 동안 사랑이신 하나님이 어떤 고통을 겪으시는지를 모릅니다. 자식이 파렴치한 죄를 저질러 감옥에 간다면,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자기합리화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더없이 비통합니다. 찢어지는 아비의 마음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기다리시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성인아이는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깨달음이 어린 아이의 수준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어렵습니다.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는 또 다른 의미는 회개의 실패를 말합니다. 잘못을 깨달았지만 금방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릅니다. 벽에 낙서를 하다가 야단을 맞았습니다. 울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돌아서자마자 잊어버립니다. 방금 야단맞고 흘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낙서를 하는 게 어린 아이의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같은 죄를 자꾸 반복하고, 더 심각한 죄를 점점 더 짓게 되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회개는 하지만 인격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며 세례를 베풀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세례를 받으러 나왔습니다. 세례 받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하니까, 걱정이 되어서 나온 것입니다. 그때 세례 요한은 신랄하게 그들에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고 하더냐!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고 나아오라!” 바로 그 바리새인들이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은 불쌍한 자들이었습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면서 지옥은 가기 싫고 그래서 세례나 받아두자는 식의 회개였습니다. 회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전혀 없었습니다.

아이도 잘못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을 고치고 올바른 삶을 살기를 거부합니다. 그게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 같은 성인아이들의 문제이고 비극입니다.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는 것은 깨닫기는 하지만 이기적이라는 뜻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아픔에 대해서는 너무나 민감합니다. 자신의 조그마한 상처에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이 호들갑을 떨며 아파합니다. 그러나 이웃의 심각한 고통과 아픔에는 감각이 없습니다. 내가 불편한 것은 조금도 참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웃의 불편함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내 문제가 아니라고 이웃의 고통에 대해서 함부로 비판합니다. 함부로 정죄합니다. 잔인한 종교행위들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덧나게 할 뿐,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성인아이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거짓된 깨달음을 버려야 합니다. 어린 아이의 깨달음을 버리십시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정직하십시오.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진정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인격이 성숙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 뒤에는 여러분이 알지 못했던 참된 자유와 기쁨이 풍성하게 부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부디 공감 능력을 키우십시오. 상대방의 시선과 감정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힘을 기르십시오. 그것이 주님이 나와 함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우리를 초청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익혀 성인아이의 틀을 벗어나는 자유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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